1997 나이아가라

2011. 12. 26. 15:08북미

 

 

미국에 남편 연수를 따라가 두달 남짓 되었다.

 

아직 남편은 연구실에서 적응하느라 힘들어하고 IMF로 치솟은 환율 때문에 우리

 

가족은 모두 고통을 받고 있었다.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엔  필요한 가재도구와 차를 마련하느라 목돈이 들어가고

 

있었다. 우린 어차피 쓰다가 한국으로 도로 실어오면 되겠다 싶어 침대, 소파, 식탁

 

등 가구 일체도 장만하기로 했었다.

 

가구점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하고 고르는 재미도 쏠쏠했다.

 

적당한걸 골라 계약을 하고 배송을 부탁하고 돌아왔는데 그 시점에 바로 IMF 가

 

터진 것이었다. 우리가 체류할 동안의 빠듯한 생활비를 생각하면 갑자기 두배

 

이상을 뛰어버린 환율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통장에 입금되는 학교 봉급은 한정되어있는데 미국에서 찾으면

 

절반보다도 훨씬 줄어들어 있을테니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우린 생각다 못해 침대와

 

책상을 제외하고 야심차게 골랐던 이태리제 소파와 식탁을 가구점 주인한테 빌다시피

 

사정해서 취소시켰다.

 

미국으로 갈 때 우린 친정엄마를 모시고 함께 갔었다. 직장생활만 하다가 갑자기

 

육아와 살림을 맡게된 딸이 걱정도 되셨고 겸사겸사 미국 구경도 시켜드리자 싶어

 

함께 간것이었다.

 

뉴욕 시티투어와 워싱턴 관광은  온가족이 함께 했지만 남편이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

 

더 추워지기전에 나만 엄마를 모시고 나이아가라를 다녀오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남편은 이미 한번 나이아가라에 다녀온 경험이 있었고 아이들은 또 기회가 올것

 

이므로. 엄마는 환율 때문에 부담스러워 하셨지만 언제 모녀간에 이런 오붓한

 

여행을 하랴 싶어 설득을 했다.

 

아직 운전에 자신도 없고 남편도 없이 혼자서 엄마 모시고 약 9시간 걸리는 여행은

 

무리이니 한인관광을 따라나섰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북쪽을 향해 하염없이 달렸다.

 

몇시간을 달렸을까 ...코닝웨어 유리 박물관엘 들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러 그릇들과 유리로 만든 작품들을 구경하고 기념품도 쇼핑하고

 

다시 버팔로를 향해서 달렸다. 버팔로에서 나이아가라로 들어가 미국측의 폭포를

 

서둘러 구경했다. 처음 본 나이아 가라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완전히 어두워져서야 다시 버팔로로 돌아와 하루를 마감했다. 

 

다음날 훨씬 큰 규모의 캐나다 폭포를 구경하는건 소위 말하는 옵션관광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돈을 더 내고 구경을 할 수 밖에.

 

그나마도 여권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가볼 수도 없었다. 눈치를 보니 아마도 불법

 

체류자의 신분이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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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찍 일어나 캐나다로 넘어갔다. 레인보우브릿지를 건너 캐나다 측으로 가니

 

폭포의 위용이 더 여실하게 드러났다. 물보라가 마치 비오는 것처럼 멀리까지 뻗어

 

있고 수많은 물방울 때문에 무지개를 쉽게 볼 수 있었다. 너무나 거대한 크기에 놀라고

 

어마어마한 물의 양에 얼이 빠졌다.

 

돈을 더 내는걸 아까워 하셨던 엄마도 캐나다의 나이아가라에 흠뻑 빠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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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주변의 모습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 아주 예쁜 단풍이 들어있어 색의 조화도

 

그림같이 고왔다.

 

이른 새벽부터 축축한 폭포 주변을 걷자니 한기가 몰려왔다. 여름에 따라오셔서

 

두꺼운 옷을 가져오지 못하신 탓에 덜덜 떠시는 엄마한테 내 스웨터를 걸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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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미국측으로 돌아와 남아있던 일행과 합류해서 염소섬을 구경하고 폭포 바로

 

앞까지 가는 유람선 Maid of Mist 호를 탔다. 타기 직전 나누어준 비닐 우의를 입어도

 

워낙 세찬 폭포의 물보라 때문에 모두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버렸다.

 

정말 폭포 가까이까지 접근하는 유람선에서 아슬아슬 가슴 졸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후로도 뉴욕 근교의 관광지를 여기저기 모시고 다녔지만 엄마에겐 나이아가라가

 

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셨다. 관광비자 육개월을 꽉 채우고 귀국하실 때 엄마는

 

좋은 구경 많이 시켜줬는데 나이아가라 말고는 기억이 잘 나지않는다고 미안해

 

하셨다. 구경시켜주어도 기억도 잘 못하는걸 무엇하러 돈들여 구경시켰냐고 자조적인

 

어조로 말씀하셨다. 공항에 모시고 가서 헤어지며 남편이 엄마한테 봉투를 내밀었다.

 

비행기 안에서 보세요. 그동안 다니신데 적었으니 보시면 기억나실겁니다...

 

엄마는 생각지도않은 사위의 마음씀에 아주 기뻐하셨고 그후 당신 친구분들한테 두고

 

두고 자랑하셨다는 후문이다. 물론 자상한 사위가 부럽다고 친구분들한테 질투 받으

 

시고 기분이 더욱 좋아지셨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