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포트리 집이야기

2012. 7. 2. 10:511997 ~ 1998 미국생활

 

 

 

한국에서는 아파트 생활만 하다가 비록 타운 하우스이지만 지하실도 있고 복층 구조로 되어있는 집에 

 

처음 살게되어 아이들처럼 나도 새롭고 즐거웠다. 타운 하우스는 아파트와 개인 주택의 장점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나같이 게으른 사람한테도 다행이었다. 개인 주택에 살았다면 눈오면 눈도 치워야하고 

 

수시로 잔디도 깎아야하고 손이 많이 갈텐데 관리인이 해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눈을 치우지않아 행인이 미끄러져 다쳐도 고소를 당하고, 잔디를 제때 깎지 않으면 도시 미관을

 

헤친다고 이웃한테 고소를 당하거나 시에 벌금을 문다니 나같이 게으른 사람이 살 곳이 못된다.

 

우리집은 이층에 침실이 두개, 일층엔 거실과 주방, 화장실 겸 샤워실이 두개, 단순 화장실이 한개

 

그리고 가라지 ( garage )라고 하는 지하실 겸 차고 이런 구조로 되어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목조의 미국집이지만 처음 살아보는 카펫 깔린 이층집이라

 

잠은 이층에서 자고 밥은 일층에서 먹고...이것조차도 신기했다. 곧 밥먹으라고 부르러 이층을 오르

 

내리는게 귀찮고 다리가 아파졌지만.

 

 

                  미끄럼처럼 신나게 타고내려오는 계단

       온통 거울로 되어있는 벽장 앞에서

 이무렵 아들녀석은 축하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사람 생일 케익도 지가 먼저 불어버리곤 했다.

 

 

우리 아들 녀석은 이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에도 카펫이 깔려있어 푹신하니 미끄럼처럼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놀이를 하고 잘 놀았다. 녀석의 기저귀를 뗄 무렵 깡통이나 아이용 변기를 아래 윗층에

 

하나씩 놓아두고 기저귀 떼기를 시도했다.  소변이 마려운 눈치가 보이면 할머니가 얼른 깡통을

 

대령했는데 이녀석은 일층에 있으면 이층 깡통을 내놓으라 하고 이층에선 일층 깡통을 내놓으라고 

 

심술 (?) 을 부려 할머니 다리 심부름을 시켰다.

 

 

 

                      오빠 친구네서 얻은 장난감 말

   주재원으로 있다가 한국으로 귀국하는 교우한테서 얻은 헌소파

 

         헌소파라 소파커버를 사다 씌워 잘 사용했다

                 오빠 친구네서 얻은 아이들 놀이 탁자

 

 

그리고 한국에선 써본적이 없는 단어 garage ( 단순히 가라지라고 표기하는게 못마땅하지만 달리

 

한글로 표기하기가 어렵다. 발음이 어렵고도 오묘한데...ㅋㅋ ) 도 처음 접하는거라 신기했다.

 

집안에선 계단으로 내려가고 밖에선 리모컨으로 열고 차를 주차하는 시스템이다. 가라지안엔 공간이

 

꽤 넉넉하여 창고처럼 안쓰는 물건도 넣어두고 냉장고가 한대 더 있어서 김치 등 저장식품도 넣어두고

 

세탁기와 함께 싱크대가 있어 손빨래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목욕탕엔 샤워부스 외에도 월풀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고장이 나있어서 사용해보진 못했다. 처음 이집에

 

도착했을 때 수도꼭지 때문에 낑낑거렸던 기억도 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방식이라 어떻게 해도 물이

 

틀어지질 않아서 당황했으나 한참을 연구하니 위로 꼭지를 잡아빼서 들어올리는 방식이었다.

 

아무렇게나 물을 써도 되는 우리나라완 달리 샤워부스나 욕조안에만 물이 내려가는 서양식 화장실은

 

끝까지 마음에 들지않았다. 물을 좍좍 뿌리며 시원하게 청소해버리고 씻다가 물을 흘려도 괜찮은

 

우리나라 화장실이 내겐 훨씬 편하다. 어쨌든  물을 튀면서 편하게 씻으려면 당장 샤워커튼이 필요

 

했다. 샤워커튼도 사다달고, 벽에 고정되어있는 샤워꼭지가 불편해서 줄과 샤워꼭지를 사다 달고.

 

무슨 일이든 직접 해야하니 남편은 귀찮아 하면서도 은근히 자신의 존재감을 즐기는 눈치였다.

 

침실엔 벽장이 잘 설치되어 있어서 따로 옷장을 마련하지않아도 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사할 때 짐이 상당히 간편할 수 있어서 좋겠다.

 

현관문은 쾅 닫으면 저절로 잠기는 형태여서 불편했다. 잠시만 방심하면 문이 잠기니 늘 열쇠를 정신

 

차려 챙겨야 했다. 그래도 아이들과 엄마가 늘 집에 있으므로 괜찮았는데 한번은 온가족이 나와

 

있다가 문이 닫혀버렸다. 열쇠수리공을 부르면 무조건 100불이라는데...낭패였다. 타운하우스는 연립

 

주택처럼 똑 같은 형태의 집이 붙어있는 형태이므로 실례를 무릅쓰고 옆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일본인이 우리 옆집에 살았는데 조용히 문을 열어주었다. 그집의 거실 발코니를 통해서 난간을 타고

 

넘어가 다행히 열려있던 우리 거실 발코니로 들어갈 수 있었다. 100불을 절약한 순간이었다.

 

그뒤로 아주 가끔 옆집의 일본인들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곤 했는데 그들은 정말 너무 조용해서

 

늘 집이 비어있나 의심이 들었다. 내 목소리가 너무 커서 가끔은 창피했다. 물론 아이들한테 소리지를

 

일이 생기면 그때부턴 항상 모든 문을 닫고 주의했다. 그들이 모든 한국인을 시끄럽고 교양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안되니까.

 

우리집 거실엔 작은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장작도 함께 있어 몇번 불을 피우고 즐거워했던

 

기억도 있다. 영화나 책에서만 보던 벽난로를 우리집에서 피우다니...당연히 기념사진도 찍었다.

 

 

 

 

집에서 2분 정도 거리에  작은 공원이 있어 아이들이 놀기에 아주 좋았다. 어린이 놀이터도 있고

 

여름엔 목욕탕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의 작은 풀이 있어 꼬마들 물놀이 하기에도 좋았다. 처음엔 그냥

 

동네에 있는 풀이라 수질이 의심되었지만 매일 물을 갈아주고 비오면 못들어가게 하고 시에서 수질을

 

엄격히 관리하는걸 보고 안심을 했다. 어린애들을 위한 시설이나 법안이 특히 잘 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IMF 의 여파는 우릴 고통스럽게 했고 무엇보다도 난방비가 특히 더 부담이었다. 렌트비만

 

이라면 견뎌보겠는데 아무리 아껴써도 전기세가 수백불씩 나오니 차라리 싼 아파트로 옮기고

 

따뜻하게 살자고 결정했다. 6개월 함께 생활했던 친정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 우린 근처

 

허드슨 테라스라는 싼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이웃 남규네가 먼저 이사하는걸

 

보고 그렇게 하기로 한것이다. 5층 짜리 서민 아파트였는데 어린아이들이 있어 1층을 택했다. 좁긴

 

했지만 렌트비에 전기료, 난방비까지 포함되었는데도 훨씬 싸서 마음은 아주 편했다. 겨울엔 더울

 

정도로 따뜻하고 여름엔 에어컨도 마음놓고 켜고. 단 세탁실은 지하에 공동으로 쓰게 되어있어 이것이

 

불편했다. 게다가 코인 런드리여서 25센트 동전을 항상 많이 바꿔야했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서도 친한 이웃을 사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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