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미국연수 시작

2012. 7. 1. 01:021997 ~ 1998 미국생활

 

 

1997년 8월 12일 우리 가족은 남편의 코넬 대학교 연수를 따라 미국 뉴저지주 포트리 ( Fort Lee )

 

라는 작은 도시로 떠났다.

 

오래된 일인데 출발 날짜까지 기억이 나는 것은 떠나던 때 약간의 우여곡절 때문이다.

 

난 그때까지 약국을 했으므로 갑자기 육아에 살림에 자신도 없었고,  그때까지 아이들을 봐주시던

 

친정엄마도 하루아침에 아이들과 헤어지는것이 서운하시고 또 무엇보다 시원찮은 딸이 걱정되어 일단

 

함께 가기로 했다. 그러니 다섯이나 되는 식구가 1년이상 살아야할 집이 필요해 마침 컬럼비아 대학

 

에 유학중이라 포트리에 살고 있다는 오빠친구한테 집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의 집은 계약을

 

하면 보통 두달치의 월세를 디파짓하게 되어있어 우리도 두달치의 월세도 미리 송금하고 모든 준비를

 

진행했다. 남편은 직장에 미리 출발 날짜를 통보하고 환송회까지 마치고 코넬대학교 부속 연구소에서

 

보내줄 비자 서류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보름이 지나고 한달이 되어가도록 서류가 오질않는 것이었다. 남편은 환송회까지 마친 상태라 다시

 

출근하기도 애매하다고 남산 도서관에도 가고 애들과 공원도 가면서 시간을 보내며 초조하게 서류를

 

기다렸다. 

 

미국측에 연락해보면 보냈으니 기다리라 하고...  6월말에 출발 예정이었는데 7월이 되도록 떠나기는

 

커녕 서류도 못받았으니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포트리의 오빠 친구는 마침 집이 썩 마음에 들지않으니 그 집을 포기하고 다른집으로 구하겠다고 통보

 

해왔다.  마침내 서류가 오고 부랴부랴 비행기표를 구해보니 아들녀석 생일이 8월 4일이라 겨우 일주일

 

차이로 비행기표값이 껑충 뛰었다. 두돌이 일주일만에 넘은것이었다. 월세 두달분 손해보고 비행기값

 

까지...  경제적 손해가 막심했고 초조하게 기다린 정신적 고통도 컸으니 어찌 그 날짜를 잊어버리

 

겠는가.  나중에 미국에 도착해서 알아보니 우리 서류는 코넬 연구소의 서류 담당 비서가 일찍 여름

 

휴가를 떠나버리고 실수로 다른이에게 인계를 하지않아 책상서랍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었단다.

 

아무튼 떠나려고 짐을 꾸려보니 이게 또 가관이었다.

 

결혼 십년차 슬슬 살림살이도 낡기 시작하고 뭐 이삿짐으로 부쳐봤자 비용만 들고...난 머리를 굴려

 

웬만한건 가방에 싸가고 미국에서 새로 사서 쓰다가 귀국할 때 이삿짐으로 가져오는게 낫겠다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옷가지에 이불, 부엌살림, 아이들 물건, 책까지 챙기니 짐이 만만치 않았다.

 

한사람 앞에 가방 20 Kg 두개씩 허용이 되니 체중계를 놓고 무게를 재면서 이민가방 9개를 채웠다.

 

그러고도 남는 신발들과 아이들 장난감, 동화책은 박스에 넣어 배편으로 소포로 부쳤다.

 

 이민가방을 공항으로 실어나르느라 작은 용달트럭까지 동원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장면

 

이다. 공항에 마중 나와주기로한 오빠친구한테도 아주 큰 밴을 미리 부탁했다.

 

친정엄마껜 미리 유모차에 탄 아들녀석만 챙겨달라고 부탁드리고 여섯살짜리 딸아이는 내가 챙기고

 

여권과 짐은 남편이 맡고... 드디어 출발이다.

 

영어가 서툰 우리 가족...불안한 마음으로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마치고 어마어마한

 

짐을 찾아 오빠친구를 만나니 너무나 반갑고 든든했다.

 

미니버스에 짐을 싣고 우리가 살게될 집으로 향했다. 조용하고 깨끗하며 안전한 동네에 위치한 타운

 

하우스인데 복층 구조로 되어있고 지하에 가라지가 딸린 아담하고 예쁜 집이었다. 집주인한테 잘 얘기

 

해서 카펫도 새로 깔아 더욱 마음에 들었다.

 

당장 필요한 쌀과 물, 우유 등 식료품과 잡화를 사러 슈퍼마켓에도 데려가주고 미리 전화 등 필요한

 

걸 다 셋업해준 오빠 친구한테 너무 감사했다.

 

아이들은 이층으로 된 집이 신기해서 즐겁게 돌아다니고 우린 우선 가방을 뒤져 급한것을 찾아내고

 

먹을걸 챙겨보았다. 엄마가 함께 가신게 얼마나 안심이 되고 다행인지 모르겠다. 모든지 서툴고

 

낯설어 남편과 함께 부딪혀봐야 하는데 아이들을 안전하게 봐주시고 때가 되면 끼니도 챙겨주시고...

 

나라는 사람은 나이가 서른다섯인데 아직 너무 많은걸 엄마한테 의존하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식사 준비를 하다보니 아무리 가방을 뒤져봐도 칼이나 작은 도마등 눈에 띄지않는 물건들이

 

있었다. 빼놓고 오진 않았는데....이상해서 살펴보니 아뿔사...가방이 한개 부족했다.

 

워낙 가방이 많아 공항에서 올 때 한개를 빠뜨렸는데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이었다. 오빠친구한테

 

전화하니 공항에 알아보고 다음날 찾으러 가자고 했다.

 

다행히도 짐 찾는데서 빼놓아 보관이 되어 있었다. 밖으로 가져 나와서 잊어버렸으면 누군가 끌고

 

가버려 아예 잃어버렸을텐데...

 

미국 생활의 첫날이 이렇게 저물고 있었다. 밤이 되었지만 우린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시차때문에

 

그리고 막연한 불안과 새로운 생활에 대한 설레임 때문에.

 

정착을 위해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은 발이 필요하니 자동차를 사는게 급선무다. 역시 오빠

 

친구가 나서서 도와주었다. 오랜 유학 생활로 영어도 너무 잘하고 현지 사정에 밝아서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중고차도 알아보았지만 믿을만한 좋은 차가 나서지않아 그냥 새차를 사기로 했다.

 

닛산 알티마...우리가 선택한 차였다. 욕심 같아서는 토요타 캠리를 타고 싶었지만 가격 차이가 

 

만만치 않아 포기했다. 알티마는 차체에 비해 배기량이 커서 힘도 좋고 괜찮은 차였다.

 

 

             우리집 앞에서

                 닛산 알티마 우리 차 앞에서

 

동네 길을 익혀가며 한인 슈퍼마켓과 미국 슈퍼마켓을 다니고 큰아이 학교 ( 유치원에 해당하는 킨더

 

가든 Kindergaten 이지만 ) 를 알아보고 필요한 물품을 사면서 조금씩 미국 생활에  적응해갔다.

 

그무렵 한국에서 미리 소포로 부친 아이들 장난감과 신발들이 도착했다. 배달해주는 우체부는 박스가

 

무겁다며 하루에 한개씩만 갖다 주겠다고 했다. 하루에 한개 씩만 오는 소포가 열어서 확인하는

 

기쁨과 더불어 기다리는 즐거움을 오히려 주었다.

 

국제 면허증을 만들어갔지만 언제까지 그걸로 버틸 수는 없고 미국 면허증을 만들어야 했다. 다행히

 

뉴저지주는 필기시험을 한국어로 치를 수 있어서 다른 주에서도 원정 (?)와서 면허증을 취득하려는 

 

한인들이 많았다. 게다가 한국어 문제지 몇장만 입수하면 그 안에서 똑같이 출제되므로 정말 필기

 

시험 합격은 식은죽 먹기였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데서...

 

간단한 신체검사만 하면 되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워낙 영어도 잘 못하는데다 긴장을 한탓에 시험

 

관의 지시가 잘 안들리고 알아듣지를 못했다. 남편은 면허증을 받았는데 나만 못받아 시력검사 하는

 

데서 내가 알아듣지 못해 떨어졌구나 낙심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한국면허증이 필요한데 그걸 소지

 

하지않아 그런것을 그당시엔 시험관이 날 무시하고 일부러 골탕 먹였다고 오해해서 혼자 골을 부리는

 

해프닝까지...ㅎㅎ

 

당당히 한번에 합격한 남편은 나중에 이걸 가지고 놀리기도 했다. 부끄러운 추억이다. 물론 재신청에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으니 별 어려운 말이 아니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한바탕 오해와 해프닝 끝에 받아든 소중한 면허증이지만 그래도 국제 면허증이 힘을 쓴 일이 있었다.

 

혼자서 물건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실수로 우회전 전용차선에 잘못 들어서 교통을 방해한적이

 

있었다. 길도 잘 모르겠고 버텼더니 갑자기 경찰이 튀어나와 교통위반 티켓을 끊으려 해서 이미

 

면허증을 갖고 있으면서도 국제 면허증을 보이며 외국인이라 길을 잘몰라 실수했다고 미안하다고

 

했더니 눈감아 주었다. 수십불 교통 범칙금을 절약한 순간이었다.

 

하루는 여권을 잃어버렸다고 온통 난리가 난 일도 있었다. 남편과 함께 필요한 물건을 사러 다니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둘의 여권이 없어진 것이었다. 어디선가 실수로 흘린 것일텐데...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낭패였다. 갔던곳을 되돌아가 한군데씩 뒤져봤으나 허사였다. 하는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주차를 하는데 집앞 길거리에 검은 수첩같은 물건이 눈에 띄었다. 우리 여권이었다. 차안에서

 

흘린걸 차문을 여닫을 때 길에 흘렸나보다. 얼마나 다행인지...

 

먼저 예일대에 연수와 있던 남편 친구를 만나 함께 뉴욕 시내관광을 하기로 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둘러볼 수 있는 방법이고 지리에 서툰 우리로서는 그게 더 나을듯 했다. 하루동안 온가족이

 

 시내 관광을 하며 거리도 눈에 익히고 설명도 들으며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말로만 듣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월가, 메디슨스퀘어, 센트랄 파크, 자유의 여신상, 할렘가 등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감을 좀 잡았다.

 

 

 

                연수와있던 남편 친구와

              시내관광중 아이들끼리 ( 가운데 아이는 남편친구의 딸 )

 

            뉴욕 시내관광중 친정엄마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

 

다음엔 아이들을 엄마한테 맡기고 남편 직장 상사의 부탁으로 맨하탄의 한 아파트를 찾아갔다. 

 

버스를 타고 가서 백몇십가 인가에서  지하철로 갈아타는데  동네가 지저분하고 흑인들만 우글거리고

 

우범지대 같이 보여 둘이서 겁이 나서  떨었다. 아파트를 찾아가 전달할 물건을 드리고 돌아오는데

 

버스를 잘못 타고 내려 또 흑인 동네에 가게 되었다. 아예 백인은 한명도 보이지않아 길거리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 택시를 불러달라고 해서 타고 집으로 왔다.

 

남편이 출근해야할 곳은 맨하탄 East 70가에 위치한 HSS ( Hospital For Special Surgery )이다

 

버스를 탔다가 지하철을 타건 버스로 다시 타건 우리가 갔던 비슷한 코스로 다녀야 하는데 매일 우범

 

지대를 지나다니는게 두렵고 싫었다. 매일 하다보면 아무렇지않을 수도 있겠지만 시간도 오래 걸리고

 

위험해보이기도 하는 그 방법보다는 차로 출퇴근하는게 낫겠다 싶었다. 우리가 살던 동네에서 맨하탄

 

으로 가려면 죠지워싱턴 브릿지를 건너야 하는데 매번 건널때 통행료가 4달러나 되었다. 게다가 

 

맨하탄은 주차료가 비싸기로 악명 높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를 포기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나중에 남편 동료들이 비싼 주차료와 통행료를 물면서 왜 차로 출퇴근하냐고 물어서 난 돈이 많아

 

하고 농담했더니 그때부터 돈많은 사람이라고 부르며 놀렸다고 했다.

 

남편이 차로 출퇴근하면 차가 한대 더 필요해서 이번에는 7년이나 된 중고차를 예일대에 연수와있던

 

남편 친구한테 소개받아  2000불에 구입했다. 기차를 타고 가서 예일대에서 차를 받아 남편

 

친구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해주고 남편이 운전해서 가져왔다.  이 차가 바로 포드 토러스 웨곤 타입

 

으로 내 생애 첫차였다. 7년이나 되었지만 마일리지도 많지않고  연수온 한인들이 얌전하게 쓰던

 

것이라 차도 깨끗하고 상태가 좋아 요긴하게 잘 썼던 고마운 녀석이었다. 이렇게 여기저기 고마운 분

 

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비교적 순조롭게 미국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엄마는 고마운 오빠친구한테 만두를 빚어 대접했고 그 오빠는 엄마표 만두를 아주 좋아했다.

 

필요한 것이 참 많았다. TV 도 소니로 32 인치 짜리를 장만하고 일제 코끼리 밥솥도 사고 영화에서나

 

보던 세워서 청소하는 청소기도 사고...그외 필요한 여러가지 물건들을 사들였다.

 

하루는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계산을 하려고 크레디트 카드를 냈더니 캐시어가 카드가 정지되었다고

 

했다. 그럴리가 없는데...다시 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남편이 카드 회사에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카드는 남편의 패밀리 카드인데 짧은 기간 동안 돈을 많이 써서 정지를 시켰다며 남편에게 너의

 

아내가 이렇게 카드 사용을 하는걸 아냐면서 이 돈을 다 지불할거냐고 물었단다. 물론 다 지불할테니

 

정지를 풀어달라고 요구한 후 전화를 끊고 남편은 에잇 남의 집을 콩가루로 안다고 기분 나빠했다.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이니 그럴법한 생각이 들었지만 좀 씁쓸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일지라도  돈

 

문제는 확실히 물어보고 따지는 그들이 합리적인 것인지...

 

이젠 가구를 골라야 했다. 침대, 남편 책상, 식탁, 소파 등 사야할 것들이 많았다. 특히 소파는 가죽

 

으로 멋있는걸 사고 싶어 여러군데를 보러 다녔다. 워낙 시간이 없이 바빴던 남편과 난 여유있는 미국

 

생활이 이내 좋아졌고 특히 이것저것 쇼핑 다니는 재미가 아주 좋았다.

 

꽤 오랜 시간 고르고 골라 드디어 마음에 드는 소파와 식탁을 골라 주문을 하니 배달오는데 20여일이나

 

걸린다고 했다. 그런데....

 

IMF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떠날 땐 환율이 달러에 904원 이었는데 1400,

 

1500원을 넘기더니 2000원을 웃도는 사태에 이르렀다. 우리가 미리 바꿔간 돈은 차도 사고 많이 

 

남지 않았는데 그돈을 다 털어 써버리고나면 또 한국에서 찾아 환전해야하는데 두배 이상 뛴 환율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난 생각다 못해 가구점으로 뛰어가서 사정을 말하고 소파와 식탁 등 비싼

 

가격의 가구들을  취소했다. 침대도 플래임은 취소하고 매트리스만 사고 남편 책상만 받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꽤 많은 돈을 세이브하고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앞으로가 막막했다.  한국에서 나오는

 

봉급이 연수때문에 상당량 깎여 나오는데 그걸 또 환전하면 얼마나 적어지겠는가.

 

더구나 우리집은 난방, 온수도 모두 전기 보일러로 하는터라 전기료가 엄청 비쌌다. 난방을 하면 비싼 

 

달러가 타는 것 같아 마음이 타들어갔다.  코스트코 홀세일에 쫒아가 전기 스토브를 하나 구입해

 

전체 난방은 밤에 자기전에 조금하고 온가족이 옷을 껴입고 스토브 앞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집안에서도 두꺼운 옷을 입고 따뜻하게 무언가를 덮고 있는 불쌍한 내새끼들 ㅠㅠ

 

 

 

'1997 ~ 1998 미국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말 즐기기  (0) 2012.07.02
파티  (0) 2012.07.02
쇼핑  (0) 2012.07.02
학교생활  (0) 2012.07.02
1997 포트리 집이야기  (0) 2012.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