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이집트 , 요르단 10 알렉산드리아
아침 일찍부터 정든 누웨바를 떠나 지중해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 Alexandria ) 로 항공 이동하는 일정이다.
누웨바에서 샤름 엘 셰이크 ( Sharm -El -Sheikh ) 공항까지는 버스로 약 두시간 정도 이동해야하므로
서둘러 짐을 챙기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하자 시내는 그저 좋아서 생글생글 웃으며 뛰어나니고 있었다.
호텔 Casa Del Mare 를 떠날 때 조용하고 온화한 미소로 시종일관 친절했던 매니저 아저씨와 시내
엄마가 바이바이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이 나는건 도대체 무슨 감정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참을 수 없이 주르륵 흘러내려 버렸다. 누가 볼세라 얼른 추스리고 애꿎은 창문만 노려
보았으나 쉽게 감정이 다스려지질 않았다.
단지 사흘을 머물렀을 뿐인데 왜 그리 서운한지... 일정도 바빴고 나이도 그렇고 , 대단히 속 깊은 얘기를
주고 받은 사이도 아니었는데 시내 엄마가 걱정이 되고 그저 서운했다.
척박한 시나이 땅, 가녀린 여자의 용감한 선택과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나도 모르게 가슴을 뜨겁게
했을까. 그녀의 꾸미지않은 웃음이 좋았고 그냥 슬펐다.
고양이와 골든 리트리버 스텔라와 철없이 뛰노는 아기 시내, 순하고 사람좋은 시내 아빠의 미소...
기가 센 땅이라는 시나이...
슬픔의 땅, 시나이 광야...내마음 한켠을 베어낸 듯 아리다.
두시간여 샤름 엘 셰이크를 향해 험한 산길을 달리는 내내 감정이 뒤죽박죽 편치 않았다. 무언가 이땅에
중요한 것을 두고 가는듯 허전했고 언젠가는 다시 한번 꼭 오게될 것 같은 생각에 내내 사로잡혔다.
사람들이 많이 움직이니 그저 즐거워하고 있다
무척 정이 들었던 예쁜 호텔 까사 델 마레
공항으로 가는 길도 내내 황량한 산길이었다
샤름 엘 셰이크는 시나이 반도 제1의 휴양 도시로 반도 최남단 삼각형의 꼭지점 끝에 위치하며 세계적인
다이빙 포인트가 널려있는 다이빙의 메카로 알려져 있다. 배낭 여행자들에게 유명한 물가가 싼 다합과
달리 유럽의 부호들이 즐겨찾는 휴양지로 유명하고, 유럽인들이 선호하는 휴양지 10위권에 든다고 한다.
특히 나하마 비치는 대단위 리조트가 들어서 있어 현지인들의 손꼽히는 신혼 여행지이다.
샤름 엘 셰이크 공항은 국제 공항으로 유럽이나 러시아에서도 다이렉트로 연결이 된다.
이곳에서 이집트 본토의 중북부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까지는 약 1시간 정도 비행 거리이고 역시 이집트
에어를 이용했다.
유명한 휴양 도시답게 공항이 깨끗하고 쾌적했다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서 시내로 이동하여 유적지 들을 방문하기로 했다.
알렉산드리아는 중화학 공업 단지가 들어서 있는 지중해 유일의 도시로 천연가스 정제 공장 등이 있다.
나일강 하류 삼각주 델타 지역에 위치해 있어 농업이 발달했고 매우 풍요로운 도시로 담수호도 가지고 있다.
지진이 여러번 났던 탓에 바닷속에 신전 등 유적들이 가라앉아 있어 해저 유물 발굴 탐사 프로젝트의
대상 도시이기도 하다.
이집트의 다른 지역과 분위기가 사뭇 다른 이 도시는 지중해를 끼고 있으므로 유럽으로의 관문이 되어주며 비록
아프리카에 속해있으나 마치 유럽과 분위기가 흡사하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수도였으며 현재의 이집트를 이끄는 선진 도시로 지중해변을 따라 근대 프랑스와 영국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유럽식 건물 들이 즐비하다. 또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로맨스의 주무대로도
유명하고, B.C 30년 이후 로마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그리스의 아테네에 버금가는 지중해의 보석으로
불리며 정치, 문화, 학문,경제적으로 지중해의 다른 도시들보다 우위에 있었던 곳으로 현재 이집트 인들의 여름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날씨도 사막성 기후인 다른 지역보다 훨씬 좋고 바다를 접한 도시답게 조금
습하게 느껴졌다.
알렉스 ( 알렉산드리아를 부르는 애칭 )는 척박한 산악지대가 많은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 대왕이
비옥한 이집트로 진출하여 세운 도시로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인들은 알렉산더를 환영했다고
한다. 알렉산더가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이집트로 진격하자 페르시아의 이집트 총독이
수도 멤피스를 넘겨주었다. 알렉산더는 이집트의 신에게 경배하고 시와의 오아시스에서 신성한 제사를
지낸 후 이집트 통치에 대한 신탁을 받았다고 선언하고 스스로를 신인 아문-라의 아들로 자처하며 이집트의
합법적인 파라오로 추대되었다.
수도를 지중해의 어촌으로 옮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로 명명했다. 비옥한 나일강의 삼각주와
운하로 연결이 쉽고 지중해의 직접 교역이 가능하며 해군기지가 되어줄 좋은 위치이므로 당대 지중해 권에서
제일가는 도시가 되었다. B.C 331 년 알렉산더가 휘하의 장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통치를 맡기고 이집트를
떠났고 B.C 305 년 프톨레마이오스는 스스로 이집트의 왕으로 선언하고 프톨레미 왕조를 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어로 아버지의 영광을 의미하며 프톨레미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클레오파트라 7세이다. 그녀는 5개 국어에 능통하고 매우 총명했으며 외교에 능한 왕이었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고심하고 애쓴 왕이었다.
지나가다 본 아파트인데 많이 낡았다
곧 다가올 이슬람의 명절 희생제에 쓰일 양들이 많이 나와 있다
거리에서 본 히잡과 부르카를 입은 여인들
알렉스는 1920년대 이후 급격한 현대화의 물결을 타고 도로와 건물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그레코로만 유적
들을 발굴하기가 어려워 많은 고고학자들이 안타까워하는 도시이다. 대부분의 발굴된 유적들도 도심 주택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데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이 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우선 주택가에 위치한 세라피스 신전으로 가서 폼페이의 기둥을 구경했다.
빈민가에 위치한 이 신전은 좁고 지저분한 골목을 한참 들어가야 만날 수 있었는데, 이집트의 오시리스신과
그리스의 최고신 제우스의 결합된 의미로 새로이 창조된 세라피스 신을 위한 신전으로 커다란 기둥이 돋보이는데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헌납된 기둥이다.
아스완에서 가져온 붉은색 화강암 하나로 만들어졌는데 기둥 꼭대기에서 발견된 유골단지가 로마의 지도자
폼페이의 것으로 잘못 알려져 불리는 이름이라고 한다. 기둥 양 옆으로 작은 스핑크스가 지키고 있다.
신전으로 가려면 이런 좁은 골목길을 한참 들어가서 주택가로 가야한다
선진 도시라는 알렉산드리아이지만 뒷골목은 지저분하고 한참 낙후되어있다
아이시 등 빵을 만들어 파는 가게
장례식을 하려고 쳐놓은 장막이 보인다
지저분한 신전의 담 너머 폼페이의 기둥이 조금 보인다
세라피스 신전 입구의 현판
폼페이의 기둥 양 옆에 스핑크스가 있다
지성소의 입구, 지하로 내려가면 지성소가 있다
여전히 발굴 진행중
신전 주위가 온통 주택가이다
강의 수위를 측정하는 나일로 미터도 발견 되었다
골목에서 만난 여인들
작은 시장이 보인다
골목길 들여다 보고 사진찍기를 즐기는 나
카타콤 ( 지하묘지 )은 사진을 절대로 못찍게 해서 겨우 입구 사진만 한장 찍었다. A.D 1세기 경 부유한
로마 귀족의 가족 묘지로 지하에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후 로마의 기독교 박해 시절 이집트의 기독교도 들이
박해를 피해 은신처로 사용했다.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1,900년 지나가던 당나귀 짐마차가
우연히 구멍에 빠지면서 발견이 되었다. 지하로 들어가 구경을 해보니 3층 구조의 무덤들이 있었고 제법 잘
꾸며져 있었지만 로마의 카타콤에 비해 규모는 훨씬 작았다. 또한 이미 룩소르나 카이로 등지에서 너무나
완성도 높은 파라오의 묘지를 보고 온 터라 로마 귀족의 묘지 정도로는 감동이 일지않았다.
무덤을 장식한 조각이나 부조 등의 예술품은 그리스 로마와 이집트 예술의 영향을 함께 받은 것으로
파라오의 것보다 훨씬 질이 떨어지고 조잡해 보였으니 이미 내 눈이 너무 높아졌음이다.
로마 원형극장은 알렉스에서 발견된 유일한 로마시대의 원형 극장으로 원래 지붕이 있었으나 지진으로
파괴되어 지붕을 받치고 있던 기둥만 남아있다. 6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안뜰에 파로스의
등대의 잔해들이 전시되어 있고 근처가 로마 시대의 목욕탕과 저택 들이 있었던 곳이라 발굴 작업이 진행 중
이었다.
카타콤의 입구, 사진 찍는걸 엄중히 지키는 경비원들의 근무 태도가 아주 우수했다
손을 흔들어 주는 가게 아저씨 ( 자체 모자이크가 됐다)
거리에서 물담배를 피고 있는 사람들
전차의 꽁무니에 앉아서 가고 있는 사람
로마 원형 극장
로마 시대의 저택과 목욕탕 들의 유적지 발굴이 진행 중이다
버스 기사와 현지 가이드가 원형 극장 입구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무슬림들은 어느 장소에서건 시간이 되면 기도를 한다
바닷가로 이동하여 콰이트베이 ( Quaitbey Fort ) 요새로 갔다.
15세기 맘루크 왕조의 술탄 콰이트베이에 의해 예전 파로스의 등대 ( Paros )가 있던 위치에 세운
요새로 지금은 댐의 건설로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원래 섬에 건립되었다. 파로스의 등대의 잔해로 지은
이 요새는 터키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지었지만 1,882년 영국의 폭격에 의해 심한 손상을 입었다.
그 후 다시 복원되고 그 중앙에는 이슬람 사원이 있다.
파로스의 등대는 B.C 279년에 항구의 동쪽 섬에 세워진 등대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함께 현존하지는
않지만 도시의 상징으로 여전히 여겨지고 있다. 여행객들의 기행문이나 고문서의 기록에 의하면 높이가
125 미터나 되고 그 불빛을 50 킬로미터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니 2,000년 전에 지어졌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규모가 크고 뛰어나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잦은 지진과 해일로 붕괴되어 모습은 볼 수 없으나 콰이트베이 요새 근처에서 잔해가 일부 발견되었고
지금도 해저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멀리 콰이트베이 요새가 보인다
열심히 사진 찍으시는 모습을
요새를 배경으로
부둣가의 장사꾼과 흥정을 하고 있다
알렉스에서부터 시와 사막까지의 일정을 함께 한 버스 기사들
장거리 여행인지라 둘이서 교대로 운전했다
해가 지기 전에 얼른 서둘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갔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문화적 중심지 역활로 유명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세계 최대의 도서관으로
유명했고 세계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당대의 학자들이 함께 토론하고 연구하는 공간이었다.
70만권 이상의 장서를 자랑했으며 세계 각 나라의 언어로 쓰여진 자료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기록을
해서 보관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것이 " 70인역 성서 "로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원본은 오랜 세월이 지나 훼손되고 없어졌지만 그 내용이 전해져 현재에도 성서 연구와 언어학상 귀중한
자료가 되고있다고 한다.
고대의 도서관은 화재로 파괴되었지만 무바라크 대통령의 요청으로 이집트와 유네스코가 공동으로 재건하여 2,002년 개관했다. 이슬람 재단과 여러 중동 국가, 유럽의 국가들과 마이크로소프트 사 등 국제 사회에서
기부하여 이 도서관을 재건한 것은 이 도서관이 단순히 이집트 만의 것이 아니고 도서관이 사라지기 전
300년간 인류문명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는 의미가 담겨있다.
도서관의 외관은 지중해에서 해가 떠오르는 형상을 의미한다고 하며 아스완에서 가져온 화강암으로 외벽을
만들고 여러 문명의 상징인 문자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한글도 몇자 새겨져 있다.
도서관 앞에서 젊은 남녀 학생들을 만나 함께 사진을 찍었다. 자유롭게 토론하며 활기찬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사진을 보여주자 남학생들이 이 사진을 꼭 페이스북에 올려 달라고 했고 여학생들은 기겁을 해서 함께
유쾌하게 웃었다. 도서관 바로 뒤에는 알렉산드리아 대학교가 있었지만 해가 지려해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부둣가로 다시 잠깐 가서 노을을 감상했다.
도서관 앞의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연인 들이 예뻐 보였다
건물이 디자인 적으로도 참으로 우수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규모도 크고 실내도 아주 쾌적하며 첨단 장비를 잘 갖추었다고 한다
대학생 들과의 유쾌한 만남
손까지 꼬옥 잡아주며 친근하게 함께 사진 찍어준 여학생들이 너무 사랑스럽다
알렉산드리아 대학
노을이 지고 있는 바닷가
저녁 식사는 씨푸드 레스토랑으로가서 각자 먹고싶은걸 먹었다. 그릴에 구운 생선과 오징어와 새우 튀김이
나왔는데 맛이 괜찮았고, 특히 생선이 들어간 수프가 파프리카를 많이 넣어서 그런지 약간 얼큰하며 입맛에
맞고 아주 맛있었다.
숙소는 사드 자그로울 광장에 있는 호텔 소피텔 세실인데 식민지 시절부터 유명한 호텔로 세계 각계의
명사들이 묵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알렉스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가 되는 이 호텔은 악티움 전쟁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한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군의 정보
기관이 사용을 했고 윈스턴 처칠 등 저명한 정치인들과 작가들이 이곳에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일단 체크인을 하고 호텔 로비에 있는 환전 머신에서 환전을 해서 시내 구경을 나갔다. 일요일이어서 거리에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작은 쇼핑 센터에도 들어가 봤는데 역시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우리가
살만한 물건은 눈에 띄지 않아서 그냥 윈도우 쇼핑만 하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호텔은 19세기부터 유명한 역사를 자랑하듯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었고, 발코니에서 밖을 보면 알렉스의
아름다운 지중해가 보였다. 엘리베이터도 옛스러운 모습 그대로이고 유명인이 묵었던 방에는 방 앞에 표시를
해놓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처칠, 오마 샤리프, 무하마드 알리, 엘비스 프레슬리....수많은 명사들의 이름이
자랑스럽게 붙어 있었다. 우리 방에도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내가 익히 아는 이름이 아니었다.
호텔 근처 광장앞
맛있었던 저녁 식사
호텔 로비에 이 호텔에 묵었던 명사들의 명단이 자랑스럽게 적혀있다
무하마드 알리의 방
엘비스 프레슬리의 방
소피텔 세실의 벨보이 아저씨, 호텔의 역사처럼 아저씨의 머리에도
하얗게 세월이 느껴진다. 친절한 이분은 직장에 대한 자부심이 크신듯 했다.